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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순신 장군 해전 순서 및 3대 대첩, 명량 한산 대첩에 대한 소개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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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순신 장군 해전 순서 및 3대 대첩, 명량 한산 대첩에 대한 소개

똔민 2023. 7. 29. 04: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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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임진왜란 때 활약하신 이순신 장군과 관련된 주제입니다. 우리나라 역사상 최고의 명장이자 위인인 이순신 장군께서는 23전 23승이라는 엄청난 전적을 남기셨는데요, 특히나 유명한 전투로는 한산대첩, 명량대첩, 노량대첩 등이 있습니다. 이 중에서도 영화로도 제작되어 많은 사람들이 알고있는 명량대첩에 대해 자세하게 알아볼까요?

거북선은 거북 모양인가요?
거북선은 귀선(龜船) 또는 거귀선(巨龜船)이라고도 하며, 판옥선 위에 덮개를 씌운 형태로서 전면부에는 용머리를 달았고 좌우현에는 대포구멍을 내었으며 뒤쪽에는 2층 구조의 공간을 두어 노를 젓는 병사들을 배치하였습니다. 이러한 특징 덕분에 거북선은 돌격용 선박으로서 뛰어난 성능을 발휘하였는데, 특히 적의 조총탄으로부터 보호받을 수 있었기 때문에 많은 적을 물리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렇게 훌륭한 거북선도 처음부터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최초의 거북선은 고려말 최무선이 개발한 화포를 이용하여 만든 함선이었으나 실전에서는 활용되지 못하였고, 이후 다시 만들어진 거북선은 1592년 임진왜란 발발 직전 전라좌수사 이순신장군이 제작했습니다.

임진왜란때 활약한 장수로는 누가 있나요?
임진왜란 초기에는 권율, 곽재우, 김시민 같은 명장들이 있었지만 전쟁이 장기화되면서 대부분의 장수들이 사망하거나 부상을 입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선조는 명나라로부터 원병을 요청했고, 명나라는 총사령관이었던 이여송을 필두로 1만여명의 군대를 파견했는데, 이때 참전했던 장수 가운데 유명한 사람으로는 진린, 마귀, 양호, 유정, 송응창, 심유경 등이 있습니다. 이중 대표적인 인물 몇 명을 소개하자면 다음과 같습니다.
■ 진린: 중국 명나라 해군 사령관이자 정유재란시 도독부사로 임명되어 조선에 파병되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 사후 관백이 된 도쿠가와 이에야스와의 협상과정에서 뇌물을 요구했다가 거절당하자 부하장수 70여명을 이끌고 철수하였다.
■ 마귀: 명의 부총병 겸 제독으로 역시 정유재란 시 조선에 파병되었으나 별다른 전공을 세우지 못하고 돌아갔다.
■ 양호: 요동 출신의 무장으로 병부상서겸직제독으로 있으면서 임란 초기에 평양성 탈환작전에 참여하였으나 패퇴했다. 후에 회령 부사로 부임했으나 여진족 토벌 과정에서 포로 수천명을 학살했다는 혐의로 탄핵받고 파면당했다.
■ 유정: 유정은 원래 이름이 유기였는데, 아버지 유승비가 아들의 이름을 유자 돌림으로 지으라고 해서 개명했다고 한다. 광해군 시절 북인 정권 하에서 벼슬길에 올랐으나 인조반정 직후 관직에서 물러났다. 병자호란 때 남한산성 포위망을 뚫고 나가 청나라 군사를 격퇴하기 위해 노력했지만 실패한다. 청태종이 직접 지휘하는 10만 대군 앞에서 항복하자는 주전파 김상헌과 끝까지 싸우자는 주화파 최명길 사이에서 중립외교를 주장하다가 결국 처형당하고 만다.
■ 송응창: 1624년 이자성의 난 진압 공로로 금릉위에 봉해졌고, 1627년 정묘호란 때 강화도로 피신하려는 왕을 호위하다 순절했다.
■ 심유경: 사신으로 와서 간첩활동을 하여 자신의 목적을 달성하려 했으나 계획이 누설되자 자살했다.

조선시대 무기체계는 어땠나요?
조선시대 무기는 크게 화약무기와 비격진천뢰같은 폭발물 두가지로 나눌 수 있습니다. 먼저 화약무기는 신기전과 화차처럼 원거리에서 공격하는 방식이었고, 비격진천뢰는 폭탄형태의 투석기였습니다. 이외에도 다양한 종류의 화기가 존재했으며, 각 지역마다 특색있는 무기개발이 이루어졌습니다. 예를 들어 평안도 지방에서는 사거리가 길고 정확성이 높은 신포를 만들어냈고, 함경도 지방에서는 유효사거리가 짧은 대신 위력이 강한 철환을 만들었습니다.

명량대첩은 어떤 전투인가요?
임진왜란 당시 조선군은 일본에게 연전연패하며 나라 전체가 위기에 빠져있었습니다. 이때 등장한 영웅이 바로 이순신 장군이었는데요, 왜군과의 첫번째 싸움이었던 옥포해전에서는 적함 31척을 격파하였고, 두번째 사천해전에서는 거북선을 처음으로 투입하여 승리하였습니다. 이후 부산포 앞바다에서 벌어진 세번째 전투인 부산포해전에서는 100여척의 배를 격침시키며 대승을 거두었습니다. 하지만 일본군은 이를 비웃으며 계속해서 쳐들어왔고, 결국 1597년 정유재란이 발발하게 됩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명나라와의 전쟁을 위해 조선 땅에서의 보급품 조달을 요구했고, 이것이 받아들여지지 않자 다시한번 침략을 감행했습니다. 그러나 이번에는 바다에서부터 공격하기 시작했는데요, 남해안 일대 해상권을 장악하려 했던것이죠. 그래서 7월 16일 칠천량전투에서 원균이 이끄는 조선수군은 대패하면서 12척의 배만 남게 되었습니다. 그러자 선조는 피난길에 올랐고, 명나라는 구원병을 보내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8월 초순 전라우수사 이억기와 충청수사 최호가 지휘하는 전선 13척만이 남아있었는데요, 경상우수사 배설이 도망가면서 버린 12척의 판옥선을 찾아내어 총 133척의 배가 집결되었습니다. 이렇게 모인 133척의 배들을 이끌고 9월 16일 울돌목(명량)으로 나아가는데요, 이곳은 조수간만의 차가 크고 물살이 매우 빠른 곳이어서 적은 수의 배라도 쉽게 통과할 수 없었습니다. 또한 지형지물이 거의 없어 적의 기습공격에 취약한 장소였습니다. 이러한 상황속에서 이순신 장군은 좁은 길목 양쪽에 일자진을 치고 적을 유인하는데요, 적군이 들어오자 학익진을 펼쳐 순식간에 포위섬멸시켰습니다. 결과적으로 단 한척의 피해도 입지 않고 333척의 함선을 모두 불태워버리는 대승을 거두었는데요, 이로 인해 '명량대첩'이라 부르게 되었습니다.

노량해전은 어떤 전투인가요?
1598년 11월 19일 새벽 2시쯤 관음포 앞바다에서 벌어졌던 전투입니다. 이날 아침 일찍 고니시 유키나가가 이끄는 1만여명의 일본군이 500여척의 배를 타고 상륙하였는데요, 육지쪽으로는 순천왜성에 주둔하던 가토 기요마사가 4천여명의 병력을 이끌고 합류했습니다. 전날 밤 조명연합군은 구례현감 변응정으로부터 퇴각하라는 명령을 받고 철수준비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때 갑자기 나타난 일본군 함대 400여척이 아군의 진영을 급습하자 당황한 아군은 제대로 대응조차 하지 못하고 속수무책으로 당하고 말았습니다. 그렇게 수많은 병사들이 죽고 다쳤는데요, 다행히 이순신 장군께서 직접 이끌던 본영의 군사들은 미리 준비한 화약주머니를 터뜨려 큰 피해없이 후퇴할 수 있었습니다. 그날 저녁 이순신 장군은 부하 장수들에게 내일 날이 밝으면 싸우자고 제안했지만 대부분의 장수들은 이미 전세가 기울었다며 반대했습니다. 그러던 중 우치적이 자신있게 나서서 싸울 것을 주장했으나 다른 장수들은 여전히 망설이고 있었습니다. 그런 모습을 보고 있던 이순신 장군은 칼을 뽑아들고 소리쳤습니다. “내가 죽었다는 말을 하지 말라”고 하면서 스스로 목숨을 끊으려 했는데요, 순간 모든 장수들이 마음을 가다듬고 죽기를 각오하고 싸웠습니다. 그리하여 마침내 치열한 전투 끝에 200여척의 선박을 파괴시키고 300여명의 전사자를 내는 전과를 올렸습니다. 비록 마지막 전투였지만 뛰어난 전략과 전술로 최후의 승리를 거둔 위대한 전투라고 할 수 있습니다.

임진왜란이란 어떤 전쟁인가요?
임진왜란은 1592년 일본이 명나라로 가는 길을 내어달라는 구실로 조선을 침략하면서 발발한 전쟁입니다. 이 때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전국시대를 통일했고, 자신의 정복욕을 채우기 위해 대륙 진출을 꿈꿨습니다. 하지만 왜군에게 보급품을 조달하던 대마도주 소 요시토시가 이를 거절하자 부산포 앞바다에 있던 일본군 함대를 기습 공격하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임진왜란의 시작이었죠.

조선수군의 활약상은 어땠나요?
당시 조선 조정은 당파싸움으로 인해 제대로 된 대응을 하지 못했고, 선조는 의주로 피난을 가게 되었습니다. 이때 전라좌수사였던 이순신 장군이 옥포해전을 시작으로 거북선을 앞세워 연전연승을 거두었고, 이후 사천포해전, 한산도대첩, 안골포해전, 부산포해전 등에서도 큰 승리를 거두며 제해권을 장악했습니다. 특히 학익진 전술을 이용한 한산도대첩은 세계 4대 해전 중 하나로 꼽힐만큼 유명한 전투였습니다.

일본해군의 상황은 어땠나요?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죽음 후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정권을 잡게 되었고, 전세는 점차 역전되어 갔습니다. 그러나 여전히 해상에서의 주도권은 조선 해군이 쥐고 있었고, 결국 정유재란때 칠천량해전에서 대패함으로써 다시한번 위기를 맞게 되었죠. 그리고 마지막 노량해전에서 이순신 장군이 전사하였고, 그렇게 7년간의 긴 전쟁은 끝나게 되었습니다.

지금까지 이순신 장군의 주요 해전들인 한산대첩, 명량대첩, 노량대첩에 대해 알아보았는데요, 저는 개인적으로 ‘살려고 하면 죽을 것이요, 죽으려고 하면 살 것이다’ 라는 명언이 인상깊네요. 여러분들도 항상 포기하지 말고 최선을 다하는 삶을 살아가셨으면 좋겠습니다. 그러면 다음시간에 만나요~ 안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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